점역 유감 by 백남중

 

우연한 기회에 중학 수학 교과서를 점역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복지관에 근무할 적에 점자를 익혔고, 컴퓨터 점역사업도 시작하여 점자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지라 선뜻 해준다고 했다.

특히 수학은 1995년경 대입 필승 수학 참고서를 점역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중학 수학 정도는 쉬울 것 같았다.

점역을 위해서 점자통일안을 보고 수학 점자에 대해 다시 리뷰하였다.

그동안 교과용 도서 및 교육용 자료 점역 출판 매뉴얼과 같은 점자 관련 매뉴얼이 발간되어 관련 자료들을 전부 입학 시험 대비하듯 다시 공부했다.

20여년 만에 점역을 하는 것이라서 구체적인 점자에 대해 약간 혼동을 했지만 점역이 가능했다.

우여곡절 끝에 전부 점역하여 보냈다.

일단 중학 수학을 점역하고 나니 좋은 기술을 묵힐 필요가 없어서 한 달에 2-3일 정도 걸릴 학습지 점역 봉사를 하기로 했다.

시각복지관에 문의하니 마침 초등학교 1, 2학년용 기초 계산 책자가 있다고 했다.

내용도 많지 않고 시간도 한 달 이상 남아 있어서 점역해 주기로 하였다.

중학 수학도 찍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덧셈책 쯤이야 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받아보니 중학 수학보다 점역하기 어려웠다.

점역 관련해 모르는 것이 중학 수학책보다 많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기초계산 덧셈책은 수학의 어려운 기호나 수식이 나오는 것이 아닌데 수식 옆의 그림으로 된 설명이 문제였다.

예를 들어 덧셈에서 첫 줄에 5, 두 번 째 줄에 8, 세 번째 줄에 2가 있는 덧셈식이 있다고 하자. 이것은 점자로 표현 할 때는 5 밑에 8, 8 밑에 +2를 입력하고 가로선(25, 25)을 입력하면 된다. 이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82의 옆에 닫는 대괄호 모양의 그림이 있고, 2개를 포함하는 대괄호는 다시 5에서 시작한 닫는 대괄호 모양과 연결되어 있다.

5 더하기 8 더하기 2가 세로식으로 있고, 8과 2의 옆에는 두 수를 합치라는 닫는 대괄호 모양이 있다. 5의 옆에는 닫는 대괄호가 있는데 8과 2를 더한 모습과 연결되어 있다. 위 그림 밑에는 위 내용을 점자로 표시한 내용이 있다

이런 경우 82를 합처 먼저 10으로 계산하고 여기에 5를 더한다는 내용인데 이것을 어떻게 점자로 표현하는가가 문제였다.

수학 점역에 관한 자료를 모두 확인해 보았다.

현재 나와있는 수학 관련 점역 자료는 한국 점자 규정 외에 위에서 언급한 교과용 도서 점역 출판 매뉴얼 그리고 수학 과학 컴퓨터 점역 교정사 양성교재(국립국어원 발행) 정도이다.

동 책자를 전부 읽어 보아도 해결 방법이 없었다.

심하게 말하면 미적분을 점역할 수 잇는데 사칙연산은 점역할 수 없는 것이다.

서울 시내 시각복지관 점역 담당팀에게 전화를 해도 모두 이러한 것을 점자로 구현하는 방법에 관한 자료는 없다고 하고 양성교재를 추천해주었다.

직원 또는 자원봉사자 교육용 교재라도 없냐고 했더니 모두 없다고 하였다.

아니 한국 점자가 정부의 규정으로 정의되어 있고, 각종 책자를 점역하고 있는데 초등학교 산수 입력할 방법이 정의된 자료가 없다니!

암담했다.

어쩔 수 없이 책자의 내용을 스캔하여 스캔 그림 밑에 내가 점역할 수 있는 방법을 점자로 기록한 후 복지관 학습지원팀장에게 보냈다.

다행히 복지관 내에 수학을 다년간 입력하신 분이 계셔서 내가 제시한 방법이 아닌 정확한 점역 방법을 알려 주었다.

수차례의 메일이 오고간 끝에 기초계산 책 점역을 마칠 수 있었다.

중학 수학 점역보다 초등학교 1, 2학년 기초계산 책자를 점역하는 것이 훨씬 힘들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수학 과학 컴퓨터 점역 교정사 양성교재를 마스터해도 7세용 기초계산 덧셈 책자를 점역할 수 없다니?

 수학 점자의 경우에는 기본적인 수식, 기호, 단위 등의 표현 방법이 점자 규정으로 정해져 있지만 기초계산에서의 그림처럼 설명된 부분에 관한 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

따라서 기초계산과 같은 산수책 점역의 경우 점역사의 경험으로 점역한다는 것이다. 새로 수학을 점역하는 경우 기존 점역사의 경험을 전수받아 구현한다는 것이다.

즉 경험을 체계화한 예제집이 없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내 주위에 수학 점자에 대해 자문을 해줄 사람이 있어서 가능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몇 가지만 익히면 가능한 수학책 점역이 물거품될 뻔했다.

만일 시각복지관 내에 한글 점자를 마스터하고 수학을 익히지 못한 점역사가 있는데 부근에 통합교육을 받는 시각장애 아동이 산수책을 점역 의뢰한 경우 어떻게 될까?

점역사는 점역을 하고 싶지만 기초적인 사칙연산 구현에 관한 자료가 없고 마땅히 문의할 곳도 없다면 어떠한 이유를 대서라도 점역을 거절하게 된다.

이 경우 피해는 시각장애인이 받게 된다.

시각장애 아동이다.

일반 아동은 맘대로 활용할 수 있는 각종 교재들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없다니?

국내 첫 점역 프로그램은 1989년 시각장애인 이대희씨가 개발한 MBT(Multi Braille Translator)이다. 이후 점자 Coder(1990년 한국밀알선교단. 후에 MILAL로 명칭 변경)), BRAVO(1991년 한국과학기술원), BrailleBest(1993, 서울시각장애인재활원, 현 서울시각장애인복지관) 등이 계속 발표되었다.

초기에는 한글 약자, 영문 2급 약자 처리가 문제가 되었지만 지금은 기술적으로 엄청난 진보를 하였다.

컴퓨터를 활용한 점역사업은 기존 점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점역을 간단한 교육만으로 점역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한글 또는 영어로만 이루어진 책자의 점역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소한의 들여쓰기 규칙만 익히면 입력 후 바로 점자로 출력이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수학, 과학, 음악 등과 같이 점역하기 어려운 자료의 경우 점역사의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점역사들이 참고할 만한 자료들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점역 방법은 다양해 졌지만 이를 활용하는 점역사는 그렇게 다양하지 않아서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컴퓨터를 활용한 점자의 구현 부분의 기술적인 문제에만 신경을 썼지 정작 이를 활용하는 점역사들의 체계적인 교육이나 관련 자료 제작에는 미흡했던 것이다.

점역사 양성교재를 마스터해도 초등 1, 2학년 기초계산 책자를 점역할 수 없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점역사 문제는 어떤 특정 기관의 사업이 아닌 시각장애인의 기본권이 점자도서 접근을 해결하는 가장 큰 열쇠이다.

다양한 사례를 담은 양질의 예제집을 발간하여 적어도 교과서, 참고서가 없어서 공부 못한다는 이야기는 없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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